[영주여행] 부석사

    1. 여행 일자 : 2019년 8월 18일 일요일


    2. 여행지    : 구문소 + 철암탄광역사촌 + 백두대간협곡열차 - V트레인(철암역~분천역) + 백두대간 수목원 + 부석사 


    3. 소재지  


    구문소(강원 태백시 동점동 산 6-3) + 철암탄광역사촌(강원 태백시 철암동 368-3) + 백두대간협곡열차 - V트레인(강원 태백시 철암동 ~ 경북 봉화군 석포면, 소천면) + 백두대간 수목원(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485) + 부석사(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57)


    4. 영주 부석사(浮石寺) 소개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화엄종찰 부석사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5점, 보물6점, 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입니다. 사찰 앞으로 펼쳐진 자연경관을 품안에 끌어 안은 모습은 마치 부처님의 온화한 자비심처럼 모든 이의 마음을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합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 데서 연유하였다고 합니다. 


    5. 영주 부석사 다음지도  및  교통편(찾아가는 길)


     1) 영주 부석사 다음지도




     2) 교통편 : 영주 부석사의 교통편에 대한 정보는 다음지도 부석사 길찾기 또는 부석사 홈페지의 교통 및 여행안내를 참고하세요.


    6. 여행 사진


    ▲ 봉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을 떠나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인 부석사 관람을 위해 부석사관광안내소(부석사 버스전용주차장,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14)에 도착합니다. 


    ▲ 명인도예미술관의 부석사에서 바람맞은 느티나무


    ▲ 소백산자락길 안내지도인데, 부석사가 소백산자락길 11자락길의 시작지점입니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소백산자락길 11자락길의 일부 구간이기도 하구요. 


    □ 소백산자락길 10자락길 : 오전댐 → 뒤뜰장터 → 봉화학예관 → 죽터 → 땅골 → 부석사(7km, 1시간 50분)

    □ 소백산자락길 11자락길 : 부석사→ 속두들 → 소백산예술촌 → 숲실 → 사그레이 → 양지마 → 남절 → 모산 → 단산지 → 좌석(시거리)(13.8km, 3시간 45분)




    ▲ 부석사 안내지도


    ▲ 부석사 매표소입니다. 문화재구역입장료가 어른 개인 2,000원이고 단체 30인 이상은 1,800원입니다. 기타 청소년 1,500원(단체 1,300원), 어린이는 1,000원(단체 800원) 입니다. 


    ▲ 태백산 부석사 일주문



    ▲ 부석사 중수기적비(浮石寺 重修記蹟碑)


    ▲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 천왕문(天王門)



    ▲ 갈림길(← 관음전, ↓ 주차장, 무량수전↑, 박물관 →)


    ▲ 갈림길(← 종무소, 무량수전 ↑, 지장전 ↗), 왼쪽으로 삼층석탑(서탑)과 중앙으로 범종각이 보이네요.


    ▲ 삼층석탑(서탑) 왼쪽 건물은 종무소입니다.


    ▲ 삼층석탑(동탑)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의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건실하고도 장쾌한 느낌이 든다.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을 지나면 가파른 계 단 ‚ 몰아쉬는 숨을 들이키면 범종루가 눈앞에 들어온다. 이어 ‚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는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반기고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부석사 동쪽 일명사터에 있던 것을 1966년 경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석사의 경관을 흐트리지않고 잘 조화되어 있다. 탑은 지석대 위에 상  ·  하층 기단을 쌓고 우주와 탱주를 각각 새겨 격식을 갖추고 있다. 또‚ 서탑에는 익산 왕궁리 5층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분안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 관광안내소


    ▲ 지장전(地藏殿)



    ▲ 응향각(凝香閣)


    ▲ 장경각(藏經閣)


    ▲ 뒤돌아본 범종각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각이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 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은 지반에 견고 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특히 이 범종각은 그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있 다.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 치기 쉽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왜 목수가 지붕을 그리했는지를 알수 있으며 그 지혜에 절로 감탄이 난다.


    ▲ 안양루(安養樓)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 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 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 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당으로 극락정토의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의상 대사(625~702)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 현종 7년(1016)에 원융국사가 고쳐지었으며,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외적에 의해 불에 타, 고려 우왕 2년(1376)에 원융국사가 다시 지었다. 조선 광해군 3년(1611)에는 폭풍우로 건물 일부가 파손되자 이를 복구하였으며, 이후 1916년에 해체 · 수리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기둥은 중간이 굵고 밑이나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 지는 배흘림기둥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물인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고대 사찰 건축의 구조와 형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장식적인 요소가 적은 간결한 형태이나 건물 규모나 완성도 면에 있어서 장엄하고 깊이 있는 법당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석등 - 국보 제17호


    부석사 석등은 無量壽殿 중심 앞 中庭 중앙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安養樓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 또한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拜禮石이 현존한다. 이들 석등은 배례석이 있는 부석사는 義湘(625~7 02)이 文武王의 뜻을 받들어창건한 이래 ‚ 그 제자들에 의해 法燈이 계속되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神琳 이후 번성하여 건물의 중창은 물론 많은 인재가 배출되므로써 華嚴宗을 크게 일으키면서 석등과 같은 조형물이 조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무량수전 안의 소조아미타여래좌상 - 국보제45호


    ▲ 양주 부석사 삼층석탑 - 보물 제249호


    무량수전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3층 석탑이다. 이 탑은 자인당의 석불들과 함께 이웃 절터에서 옮겨진 것이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이다. 지대석과 하층 기단의 중석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8매 석으로 짜였고중석 각 면에는 2개씩의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상층 기단의 중석은 각 면이 1매의 판석으로 짜였고 각 면에는 위 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그 위로 탑신부가 올려져 있고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각층의 탑신에는 각기 우주만 있을 뿐 조각을 새기지 않았다. 옥개석의 받침은 각층 5단이고 낙수면의 네 모서리는 약간 반전되었다. 3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그 위의 상륜부엔 현재 노반과 넓적한 복발만이 남아 있다.


    ▲ 부석사 선묘각(善妙閣)


    ▲ 부석사(浮石寺)의 유래가 담긴 부석(浮石, 뜬돌)입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 데서 연유하였다고 합니다. 


    ▲ 부석(浮石, Buseok, Rock floating in the air)


    신라 문무왕 1년(661) 의상대사(義相大師)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대사를 연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때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후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神龍)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 돌을 '부석'이라 불렀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 종각


    ▲ 관음전 방향으로 이동


    ▲ 관음전(觀音殿)


    ▲ 관음전에서 바라본 조망 ①


    ▲ 관음전에서 바라본 조망 ②


    ▲ 관음전에서 바라본 조망 ③


    ▲ 뒤돌아본 관음전



    ▲ 천왕문


    ▲ 당간지주


    ▲ 부석사 중수기적비(浮石寺 重修記蹟碑)


    ▲ 부석사 일주문


    ▲ 부석사 매표소


    ▲ 명인도예미술관(옹기나라 도예공방, 연암식물원)을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 부석사관광안내소(부석사 버스전용주차장)에서 오늘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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