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여행] 수원화성박물관

    1. 여행 일자 : 2019년 1월 18일 금요일


    2. 여행지    : 수원 화성행궁 + 수원화성박물관 + 수원화성 성곽길 스탬프투어 + 수원전통문화관


    3. 소재지  


    수원 화성행궁(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 수원화성박물관(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21), 수원화성 성곽길 스탬프투어(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원전통문화관(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93)


    4. 수원화성박물관 소개


      

    수원화성박물관은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중심부에 자리잡아 접근성이 용이하고 모형과 관련 유물의 전시를 통해 화성 축성에 대한 전반을 이해할 수 있게 건립되었습니다. 모형과 관련 유물의 전시를 통해 화성 축성에 대한 전반을 이해할 수 있게 건립되었습니다. 상설 전시공간으로 수원화성의 축성 과정과 도시발전을 알려주는 화성축성실과 수원화성 축성에 참여한 인물과 정조의 8일간의 행차, 더불어 화성에 주둔하였던 장용영의 모습을 보여주는 화성문화실이 있습니다.


    5. 수원화성박물관 시설안내도, 요금 및 교통편(찾아가는 길)


     1) 수원화성박물관 시설안내도




     2) 요금 : 개인은 어른 2,0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이고 단체(20인 이상)는 어른 1,000원, 청소년 및 군인 500원 입니다. 


     3) 교통편 : 수원화성박물관 교통편에 대한 정보는 다음지도 화성화성박물관 길찾기를이용하세요.


    6. 여행 사진


    ▲ 수원 화성행궁을 한바퀴 둘러보고 수원화성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 수원화성박물관 바로 오른쪽에는 수원시 팔달구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수원화성박물관 안내데스크(인포메이션)입니다. 이곳에서 표를 구해야 하는데요. 어른은 2,000원, 청소년 · 군인은 1,000원, 어린이 · 노인은 무료로 입장이 가가능합니다.


    ▲ 1층은 따로 둘러보지 않았습니다. 1층 중앙전시실의 화성모형도입니다.


    ▲ 1층 정조대왕의 을묘년(1795) 수원행차


    ▲ 화성축성실(Hwaseong Construction Gallery) 입구


    ▲ 2층은 화성축성실과 화성문화실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화성축성실 안내도입니다. 정조와 수원, 수원화성 축성, 신도시 수원 건설 순으로 전시되어 있네요.


    ▲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 1752~1800)


    조선후기 문예 군주이자 개혁 군주로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발전시키고 장용영을 창설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탕평정책을 추진하여 정국을 안정시켰다. 정조는 신분에 관계없이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차별받던 서얼들을 등용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더불어 국가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오늘날 조선시대 세종과 더불어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특히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과 신도시 수원 건설을 통하여 오늘날 수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 황금갑옷을 입은 정조


    정조는 선왕 영조와 마찬가지로 많은 행차를 했으며 행차가 지나갔던 지역의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는 백성들과 직접 대변하여 사회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의도와 더불어 장엄한 행차를 통해 국왕의 위엄을 알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정조의 행차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1795년 윤2월의 수원행차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 수원행차는 7박 8일간의 일정으로 약 6,300여명이 동원된 대규모 행사였다. 군복인 융복을 입고 수원으로 행차하던 정조는 화성에 입성하기 전에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갑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는 수원화성의 완공(1796년)을 앞두고 왕조의 중흥과 그 권위를 통하여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애민정신의 실천을 통해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어 왕권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자 함이었다.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기 '둑(纛)'과 용이 그려진 대형 깃발 '용기(龍旗)' 역시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 영조예필 - 송죽(松竹)


    ▲ 조선후기 문화의 황금기 영조-장조(사도세자)-정조의 시대


    ▲ 사도세자의 무덤, 현릉원의 조성


    ▲ 사도세자의 권위 회복 추진


    ▲ 정조대왕 연보


    ▲ 수원화성의 축성계획과 다산 정약용의 거중기 설계


    ▲ 축성 일정표


    ▲ 수원화성 축성 종합보고서. 화성성역의궤


    정조의 명령으로 1796년 완공된 수원화성의 축조에 관한 기록을 집대성한 책이다. 1801년에 간행된 종합공사보고서로 건축도면과 축성 기계의 그림도 수록하여 당시의 건축기술과 과학수준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자료다.


    ▲ 성곽의 꽃 수원화성


    화성은 조선 성곽의 꽃이자 세계 성곽사의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는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 초기 군사 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다." 라고 하였으며, 국제기념물유적협회는 "화성은 18세가 군사 건축물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럽과 극동아시아 성제의 특징을 통합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 수원에 지은 정조의 궁궐, 화성행궁


    행궁은 휴양, 피난, 능행(陵幸) 등을 위해 국왕이 왕궁을 나왔을 때 임시로 생활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화성행궁을 비롯하여 10여 개의 행궁이 있었다. 정조는 1789년 이후 매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을 찾을 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 농업개혁의 산실, 수원


    ▲ 시전


    ▲ 화성기적비(華城紀跡碑)


    화성 축성의 전반적인 과정이 기록된 비석으로 정조의 명에 따라 1797년 1월 김종수(金鍾秀)가 작성하였다. 정조가 화성 축성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정조의 위민 정신과 개혁 의지를 느낄 수 있다. 


    ▲ 화성문화실 입구입니다.


    ▲ 화성문화실 입구의 안내도인데요. 8일간의 수원행차, 화성 축성의 공신, 장용영과 화성 방어체계 순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 화성성묘전배도(윤2월 11일), 낙남헌방방도(윤2월 11일), 서정대야조도(윤2월 12일)


    ▲ 을묘년 수원행차의 새로운 길, 조선 최대의 국왕행렬 1795년 수원행차


    ▲ 33년만의 재회, 혜경궁 홍씨의 현륭원 참배


    정조는 수원행차의 첫 행사로 현륭원 참배를 계획했으나 장거리 여행으로 지쳐있는 혜경궁 홍씨를 위하여 하루 뒤로 미루었다. 수원에 도착한 셋째날(윤2월 12일) 새벽,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가 계시는 현륭원으로 향했다. 정조의 누이동생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 역시 뒤따랐다. 남편을 떠나보낸 지 33년 만에 무덤을 찾은 혜경궁 홍씨는 그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설움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였다. 


    ▲ 신풍루에서의 진휼


    혜경궁 홍씨 회갑연 다음날 정조는 어머니의 은혜가 모든 백성에게 미치도록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주었다.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사민(四民 : 홀아비, 과부, 고아, 자녀 없는 노인) 50명과 진민(賑民 : 가난한 사람) 261명에게 쌀을 지급하였고, 이곳뿐만 아니라 신창, 사창, 해창에서도 그렇게 하였다. 이로써 수원의 시민 539명, 진민 4,813명에게 약 368석의 쌀이 지급되었다. 이는  그 당시 약 6만 명의 수원 인구 중 약 10분 1에게 혜택을 배푼 셈이다. 을묘년에 왕실에서 맞이하는 기쁨을 백성들과 함께 하고자하는 정조의 마음이었다. 


    ▲ 체제공 초상 유지초본(체제공 72세 때의 초상화 밑그림, 보물 제1477-1호)



    ▲ 정조의 군제 개혁, 화성을 지키는 조선 최강의 군대 장용영


    ▲ 조선도검


    ▲ 화성의 무기들


    ▲ 정조의 꿈을 실현하는 수원


    정조는 수원을 무대로 개혁 의지를 실현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왕권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백성들을 위하여 다양한 정책을 펼쳐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역사는 그를 탕평군주, 개혁군주, 애민군주로 평가하며 조선의 대표적인 성군으로 칭송하였다. 


    220년 전 정조는 사도자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팔달산 아래에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이곳에서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해 나갔다. 이후 수원은 수도 한양에 버금가는 도시로 탈바꿈해 갔고 수원이 성장할수록 왕권의 지엄함도 높아져갔다. 이렇듯 수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정조의 개혁정책은 왕권을 강화시켰고 이는 왕실과 관료들보다는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위한 길이었다. 힘없는 민초들을 위해서 쓰는 국왕의 힘, 이것이 바로 정조가 바라던 진정한 왕권 강화였다. 비록 정조의 급작스런 승하로 인하여 꿈은 스러졌지만 아직 끝나지않은 정조의 개혁정신은 이곳 수원에서 계승되고 있다. 앞으로도 수원화성은 체계적인 복원 계획에 따라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성장하여 개혁정신을 실현해 나갈 것이다. 


    ▲ 3층 입구는 출입금지네요. 2층 화성축성실과 화성문화실은 관람하고 밖으로 나옵니다.


    ▲ 야외에는 수원 화성 성곽길 스탬프투어의 제2경 수원화성박물관 스탬프가 있고


    ▲ 수원화성 축성당시 사용한 거중기, 녹로, 유형거 등의 과학기기 등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 유형거(遊衡車)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이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고안해 사용한 수레이다. 수레바퀴가 너무 크고 잘 부러지는 약점과 힘이 많이 드는 썰매의 단점을 보완해 새롭게 만들었다. 특히 저울의 원리를 이용한 반원 모양의 부품인 복토(伏兎)는 수레의 무게중심을 평형으로 유지시켜 수레가 비탈길에서도 빠르고 가볍게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화성 축성에는 일반 수레 100대가 324일 걸려 운반해야 할 짐을, 유형거 70대로 154일만에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어 유형거의 뛰어난 성능을 알 수 있다. 


    ▲ 거중기(擧重機)


    거중기는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로, 오늘날의 기중기와 비슷한 도구이다. 위와 아래에 각각 4개씩의 도르래를 연결한 후 그 끈을 물레에 감아 당기면 무거운 물건도 가볍게 들어 올릴 수 있어 화성 축성에 큰 도움이 되었던 도구이다. 


    ▲ 녹로( 轆轤)


    긴 장대 끝에 도르래를 달고 끈을 얼레에 연결하여 돌을 높이 들어 올리는데 사용하던 도구로, 높이가 11m에 이른다. 화성 축성때 2개를 만들어 높은 성벽을 쌓는데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후의 각종 궁궐 공사에도 활용되었다. 



    ▲ 선정비(善政碑) ▼


    선정비는 좋은 정치를 베풀었던 지방 수령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으로, 송덕비(頌德碑) 또는 불망비(不忘碑)라고도 부른다. 중동사거리를 비롯한 수원의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서 박물관의 야외에 전시하였다. 



    ▲ 수원 화성행궁에 이어 수원화성박물관을 둘러보았는데요. 다음 포스팅에서는 수원전통문화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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