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여행] 수원 화성행궁

    1. 여행 일자 : 2019년 1월 18일 금요일


    2. 여행지    : 수원 화성행궁 + 수원화성박물관 + 수원화성 성곽길 스탬프투어 + 수원전통문화관


    3. 소재지  


    수원 화성행궁(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 수원화성박물관(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21), 수원화성 성곽길 스탬프투어(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원전통문화관(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93)


    4. 수원 화성행궁 소개


      

    수원화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수원화성행궁’ 입니다.  화성행궁은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로 모두 576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의 규모로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옮긴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수원행차를 거행했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습니다. 1795년에는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는 진찬연을 여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청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습니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하였습니다.


    5. 수원 화성행궁 관람안내도, 요금 및 교통편(찾아가는 길)


     1) 화성행궁 관람안내도




     2) 요금 : 개인은 어른 1,5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어린이 700원이고 단체(20인 이상)는 어른 1,200원, 청소년 및 군인 800원, 어린이는 500원 입니다. 


     3) 교통편 : 수원 화성행궁의 교통편에 대한 정보는 다음지도 화성행궁 길찾기 이용하세요.


    6. 여행 사진


    ▲ 수원화성 성곽길 스탬프투어 트레킹을 위해 수원 화성행궁(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에 도착해 수원 화성행궁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 수원행성 광장의 수원화성 관광정보센터


    ▲ 수원화성 행궁 광장 안내도


    ▲ 주차장


    ▲ 신풍루(新豊樓)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 (鎭南樓)라고 하였습니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습니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입니다.


    ▲ 신풍루 우측 담과 북군영 건물


    ▲ 신풍루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수원관광안내소가 있습니다.


    ▲ 조금 걸으면 좌익문 오른쪽으로 느티나무와 담 아래 스탬프가 있네요.


    ▲ 느티나무


    화성행궁의 느티나무는 600년 이상된 노거수로 화성 성역 이전부터 수원을 지켜온 신령스런 나무이다. 영목, 신목, 규목이라고 불려왔으며 예부터 잎이나 가지를 꺽으면 목시느이 노여움을 사 어려움이 닥친다고 하였다. 또한 소원지에 소원을 적어 걸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전설이 있다. 


    높이는 30m, 둘레는 6m에 이르며, 1982년 경기도 보호수 5-3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화재로 인해 훼손되어 수원시는 2003년 5월 대대적인 나무살리기 작업을 하였으며 현재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 수원화성 스탬프 투어의 제1경인 화성행궁 스탬프


    ▲ 느티나무 위쪽의 문으로 들어가면 집사청(執事廳)이 있습니다.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 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입니다. 죄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세웠습니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저 있습니다.


    ▲ 북군영(北軍營)은 관계자외 출입금지로 들어갈 수 없네요.


    북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 숙위하는 건물입니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습니다.


    ▲ 집사청에서 나와 스탬프 왼쪽의 문으로 들어가면 쉼터가 있네요.


    ▲ 뒤돌아본 신풍루


    ▲ 좌익문(左溺門)을 지나면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道)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입니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습니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 중양문(中陽門)이 나오네요.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입니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 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습니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습니다


    ▲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 (壯南軒)이라고도 힙니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습니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습니다.


    ▲ 봉수당 내부의 모습입니다.


    ▲ 봉수당 왼쪽의 경룡관(景龍館)


    경룡관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 왔습니다. 

    정조는 당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1794년(정조 18)에 세워진 경룡관을 2층 구조로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 봉수당 오른쪽의 화령전(華寧殿) 입구로 들어갑니다.


    ▲ 노래당(老來堂)


    노래당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로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화성 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데,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한 초익공(初翼公) 양식의 팔작지붕집입니다. 1794년(정조 18) 행궁을 증축할 때 5량 7칸의 규모로 새로 지었으며, 편액(扁額)은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나 전하지 않습니다. 북쪽으로 낙남헌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득중정과 통합니다.


    ▲ 낙남헌(洛男軒)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년(정조 18)에 완공되었습니다. 1795년(정조 19)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습니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습니다.



    ▲ 화령전(華寧殿)


    화령전은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건물로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影殿)입니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던 곳입니다. 화성에서 ‘화’자와『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령’자를 따서 이름 붙인 것입니다.



    ▲ 운한각(雲漢閣)


    운한각은 화령전의 정전(正殿)으로 정조의 초상화를 봉인한 건물이다. 운한은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늘에 기우제를 올릴 때 불려 졌다는 시경 의 시 구에서 따왔다. 앞에는 제사 때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월대가 잇고, 세 개의 계단이 놓여 있는데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다. 1801년에 만들어진 조선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 풍화당(風化堂)


    재실로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이 미리 와서 머무는 건물이다. 풍화는 사회의 풍속과 기강을 교화시키니다는 의미이다.


    ▲ 전통 화장실


    ▲ 제정(祭井)


    제정은 화령전의 제례에 사용될 정화수를 뜨는 우물로 어정이라고 한다. 화령전 제정은 정방향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4면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 올렸다. 높이는 5.5m이고 바닥에서 물이 고인 높이는 약 4m이다. 


    ▲ 득중정(得中亭)


    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습니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 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한 것입니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 (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입니다.


    ▲ 내포사(內鋪舍)


    내포사는 행궁의 뒷담 안 왼쪽 기슭의 미로한정의 북쪽 50보(59.4m)쯤 거리에 위치하였습니다. 1796년(정조20) 9월 9일에 준공된 이 건물의 높이는 7척 5촌(2.32m)입니다. 다만 온돌 1칸만을 놓았으며, 앞으로 반칸을 물려서 벽돌을 깔았습니다.


    ▲ 글 읽는 환관


    봉수당과 장락당 뒤편의 행각에 위치한 공간으로 환관이 서책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 채비하는 환관


    봉수당과 장락당 뒤편의 행각에 위치한 공간으로 환관이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장면이다.


    ▲ 나인처소


    봉수당과 장락당 뒤편의 행각에 위치한 공간으로 침방나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다. 


    ▲ 침소에 들기 전 혜경궁 홍씨


    상락당이 지어진 다음해 1795년 을묘원행 때 혜경궁 홍씨가 실제로 이곳에서 머물렀다. 침소가 차려진 혜경궁 홍씨 방을 연출한 공간이다.


    ▲ 경룡관(景龍館)


    ▲ 장락당(長樂堂)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습니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습니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습니다.


    ▲ 복내당(福內堂)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습니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습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드라마 <대장금> 속 수라간


    화성행궁은 2004년 종영한 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지로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드라마 속 수라간(水라間)의 모습을 재현했다. 수라간은 임금의 수라와 잔치음식을 준비하던 궁중 부엌으로 소주방(燒廚房)이라고도 불린다.


    ▲ 유여택(維與宅)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습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습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 유여택의 뒤주


    뒤주는 곡식(쌀, 콩, 팥) 등을 담아 보관하는 생활 용기입니다. 쌀벌레가 생기지 않는 회화나무로 만드는 것이 가장 좋으며, 두꺼운 통판으로 궤짝처럼 짜고 4기둥에는 짧은 발이 달려있습니다. 뚜껑은 위로 제쳐서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쌀뒤주는 보통 쌀 1~2가마가 들어가는 크기이며 잡곡뒤주는 이보다 작습니다.


    1762(영조 38)년 윤5월에는 정조임금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뒤주와 관련된 속담으로는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가 있으며, 무엇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 그것이 더 애석하게 여겨지고 더 간절히 생각난다는 말입니다.


    ▲ 외정리소(外整理所)


    정리소는 장차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정조 20) 화성 행궁이 완성 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습니다.



    ▲ 기층헌(起層軒)은 악기 등을 보관한 곳이네요.


    ▲ 비장청(婢將廳)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입니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습니다.


    ▲ 서리청(書吏廳)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입니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입니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 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 남군영(南軍營)


    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 숙위하는 건물입니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 하였습니다.



    ▲ 수원화성 성곽길 스탬프투어의 제1경인 수원 화성행궁을 둘러보았는데요. 수원행궁은 정궁 형태로 이루어진 국내행궁중 가장 큰 규모로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수원화성박물관을 소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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