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선사 정보 금선사는 고려와 조선이 왕조교체기 때 무학(無學)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무학대사는 조선의 도읍을 정하고자 삼각산을 살피던 중, 지금의 금선사 터에 삼각산의 정기가 서려있고, 부처님이 상주하시며 중생들을 제도하는 형상과 같다고 하여 절을 짓고, 금선(金仙:금빛의 신선 즉, 부처)사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목정굴이 관음기도성지로 알려졌다. 또한 금선사 농산스님이 정조의 왕세자인 순조로 환생하였다는 설화도 전해지는데, 이를 계기로 1791년 정조의 명으로 원찰이 되기도 하였다. 설화에 의하면 금선사의 농산스님은 조선후기 사찰에 가해지는 각종 국역에 의해 피폐해지는 불교를 구해낸 인물로 묘사되어 있어 사찰의 규모는 작아도 위상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금선사는 조선후기 사대부 ..
북한산 정보 북한산(北漢山 Bukhansan)은 서울시의 성북구·종로구·은평구·강북구와 경기도 고양시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836m). 본래 한산(漢山)이라 불렸는데 ‘큰 산’이라는 뜻의‘산’을 한자로 차음 하여 표기한 것이다. 한산이란 이름은『삼국사기』,『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등에 보이며, 서울 지방의 옛 이름을 한산·북한산·북한산성·북한성·한양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산은 처음에는 산 이름이 아니라 서울의 옛 이름인 한산의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에는 “양주 지경에 있다. 화산(華山)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잇닿은 봉우리와 겹겹한 산봉우리가 높고 낮음이 있다. 또 삼..
북한산 삼천사 정보 삼천사는 서기 661년(신라 문무왕1) 원효(元曉)대사가 개산(開山)하였다. 1482년(조선 성종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여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1592년(조선 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승병들의 집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임란 중에 소실되었으나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마애여래입상 길상터에 진영 화상이 삼천사(三千寺)라 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평산 성운 화상의 발원과 삼천사 불자들의 염원을 함께하여 조성된 세존진신사리불탑은 한국 석탑의 대표로 뽑는 국보 제48호 오대산 월정사 9층 석탑과 인도 석탑의 대표인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아쇼까 (석주 4두(四頭) 사자..
북한산 국녕사 정보 북한산성 안에 자리했던 주요 사찰들은 대부분 1712년 성능(聖能) 스님이 북한산성 도총섭이 된 이후에 승병이 머무르는 군영(軍營)으로서 창건되거나 중창이 되었다. 북한산성 가사당 암문 아래에 자리한 국녕사도 1713년 승병(僧兵)의 군영이라는 목적으로 창건된 사찰이다. 당시 승군들은 북한산성 수비와 관리를 책임지는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승군이 머무를 수 있는 도량은 필수적이었다. 창건 이후 국녕사는 갑오경장으로 의승군(義僧軍)이 폐지 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이후 노역에 지친 많은 스님들이 떠나게 되어 한국전쟁 이후까지 폐허로 남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국녕사가 편안하면 나라가 편안하다”고 한다. 이는 도성의 외곽에서 수비를 책임지는 막중한..
북한산 노적사 정보 1711년(숙종 37)에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 성내의 군사요충지에 사찰 13곳을 건립하여 산성의 수비와 성곽 관리를 맡겼다. 이런 사찰을 승영사찰(僧營寺刹)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승군을 주둔시키고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를 두어 병영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노적사도 승영사찰이었는데 당시에는 진국사(鎭國寺)라고 했다. 위치로 미루어 중성의 수축과 방어를 맡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북한산성 축성 과정과 현황을 정리한 '북한지'(北漢誌, 1745년 간행)에는 "진국사는 노적봉(露積峯) 아래에 있으며, 85칸으로, 승려 성능(聖能)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 경내에 있는 대웅전, 나한전, 삼성각, 종각, 요사채 등의 건물과 석불입상은 모두 최근에 지은 것으로, 옛 진국사의 모습은 남..
북한산 태고사 정보 고려 말기에 대표적인 선승이자 왕사·국사를 지낸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가 창건한 사찰이다. 보우는 중흥사를 중창하고 그 동편에 암자를 지어 5년간 머물렀는데, 이 암자가 바로 지금의 태고사(太古寺)이다. 고려 멸망 이후 거의 폐허가 되었으나, 북한산성 축조와 함께 승병이 주둔하는 승영사찰로 1713년에 중창되었다. 이 절을 중창한 성능대사가 지은 북한지(北漢誌, 1745년 간행)에는 태고사의 규모는 131칸에 이르면, 경내에는 서적 출판용 목판 5700여 매와 활자 11두(斗), 화약용 흑탄 1,600여 석을 비축하였다"라고 전한다. 현재 태고사에는 지정문화재로 보우의 행적을 기록한 원증국사탑비(보물 제611호)와 그의 사리탑인 원증국사탑(보물 제749호)이 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