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지리산 화엄사
- 사찰
- 2023. 4. 13.
1. 여행 일시 : 2023년 4월 2일 일요일
2. 여행지 : 대한불교조계종 19 교구 본사 화엄사(華嚴寺)
3.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마산면 황전리 12)
4. 화엄사(華嚴寺) 소개
화엄사는 백제 성왕 때 인도의 스님이신 연기대사가 문수보살의 현몽으로 비구니스님이신 어머니를 모시고 지리산으로 오게 된 천 년 넘은 고찰이며 지리산에 숨어있는 보물창고 같은 절입니다. 나라에서 정한 문화재들이 곳곳에 숨어있고 보물보다 더 아름다운 보물들이 워낙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엄사는 한 번에 다 담아갈 수 없는 절입니다. 1500년을 이어 온 화엄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지리산 자락에 걸린 구름과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함께 머무르는 곳이니 자연스럽게 몇 번이고 다시 찾게 되는 절입니다.
화엄사는 544년에 연기(緣起) 조사께서 창건하였습니다. 연기조사는 화엄경과 비구니 스님인 어머니를 모시고 지리산 자락 황전골에 전각 두 채의 작은 절을 지었습니다. 절의 이름을 화엄경에서 따서 화엄사라 했습니다. 화엄경은 부처님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를 기록한 경전이니 화엄사가 곧 부처님의 세계이고 깨달음의 성지라는 뜻입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후에는 의상대사께서 화엄사를 화엄종의 원찰로 삼아 머물고, 신라 경덕왕 때 이르러 8 가람, 81 암자의 대사찰이 되었습니다. 이때 남방제일화엄대종찰이란 명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각황전 기단, 각황전 앞의 석등과 대석단, 동서오층석탑, 그리고 효대라 불리는 사사자삼층석탑과 석등이 당시의 유적입니다.
임진왜란 때는 화엄사의 혜안선사와 벽암선사께서 승군을 일으켜 땅을 지키고 자운스님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바다를 지켰습니다. 비록 주지스님인 설홍대사와 300여 스님들이 목숨을 잃고 화엄사가 왜군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지만 중생을 살피고 나라를 지키려는 정신을 고이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불타버린 화엄사는 1630년경 나라의 지원을 받아 벽암선사에 의해 여러 전각이 복원되었습니다.
이처럼 화엄사는 질곡의 역사 앞에 비켜서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부흥쇄락의 시기가 반복되었지만 지리산의 은근함을 닮은 불법의 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맑은 물, 신선한 공기. 천 년의 자비와 미소가 숨 쉬는 지리산 화엄사. 지리산의 풍광과 섬진강의 바람이 함께하는 산사 체험을 통해 영혼을 밝히는 참다운 지혜를 만나보세요.
5. 화엄사 가람배치도
6. 입장료 및 주차료 : 성인 4,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5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고, 주차료는 무료입니다.
7. 화엄사 여행기 및 여행 사진
▲ 전남 구례에 위치한 지리산 화엄사에 도착해 화엄사 자연관찰로와 화엄사 경내를 둘러보았는데요. 화엄사는 2017년 7월 여름에 성삼재에서 시작해 노고단을 거쳐 화엄사로 내려왔던 산행의 추억이 깃든 사찰이기도 합니다.
▲ 화엄사 입구에서 다리를 건너 다향찻집 왼쪽의 자연관찰로를 먼저 걷고 화엄사 경내를 천천히 내려오면서 둘러보았습니다.
▲ 다리 위에서 바라본 다향찻집인데요. 봄의 벚꽃이 화사하게 피었습니다.
▲ 다향찻집 앞의 이정표(← 화엄사 0.1km, 천왕봉 32.5km · 성삼재 7.5km · 노고단고개 7,0km · 연기암 2.0km ↑, 연기암 3.9km →)에서 자연관찰로 방향으로 올라갑니다.
▲ 화엄사 자연관찰로(화엄계곡 치유탐방로의 제1탐방로 : 화엄사입구 ~ 연기암)
화엄계곡 치유탐방로는 계곡과 숲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환경요인들로 인하여 인체의 면역력을 높이고, 보다 활기찬 기운을 북돋을 수 있는 곳입니다. 피톤치드와 음이온, 산소, 햇빛, 다양한 동, 식물들을 통해 활기찬 기운 충천하세요.
▲ 오른쪽 계단은 치유탐방로의 제2탐방로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 화엄사와 자연관찰로를 이어주는 홍교인 삼소교(三笑橋)
▲ 삼거리 갈림길에서 바로 올라가면 자연관찰로 끝지점인 연기암으로 올라갈 수 있고, 왼쪽은 화엄사 방향으로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왼쪽으로 내려갑니다.
▲ 삼전(三殿)
▲ 문화재정비소
▲ 명부전(冥府殿)
▲ 영전(影殿)
▲ 나한전(羅漢殿)과 원통전(通殿)
▲ 영전(影殿)과 대웅전(大雄殿)
영전(影殿)
본래 영전은 응향각(凝香閣)의 중노전(中爐殿)으로 대웅전, 나한전의 소임을 맡은 스님이 거주했던 전각이었는데 영전으로 바뀌면서 연기조사, 자장율사, 원효성사, 의상조사, 도선국사등 화엄사의 역대조사, 선사, 대사 분들의 영정(影幀)을 모셨던 전각이다.
조선 인조 10년(1632) 때 벽암선사가 중건하고, 헌종 2년(1836)에 선일(善馹) 스님이 보수, 명선 스님 때 1976년에 고승영전 여러 점 도난 당했으며, 도광선사께서 1983년 영전 왼쪽 뒷방 개조, 1997년 종열스님이 보수, 각황전에 불단해체보수 하면서 불단에 있던 화엄석경(華嚴石經)을 옮겨 놓았으며, 종삼 주지스님이 2006년 도량 복원 정비불사 하면서 영전 기단부와 계단을 다시 조성했으며 2012년 10월에 주련을 달았다 다.
영관 주지스님이 2013년 6월 3일에 화엄석경을 화엄사 성보박물관 지하 보관실로 옮겼다. 6월에 해체보수 하면서 왼쪽 2칸 앞은 야경실 뒤는 선원접견실, 오른쪽으로 3칸 석경보관 했던 것을 타 터서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면서 영전 안 바닥 전체를 마루로 바꾸고 기단부와 계단을 다시 조성하여 12월 13일 완성했으며 2014년 4월 22일 영전 고색 단청을 마쳤다.
▲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左), 각황전(覺皇殿),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右)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 조사가 조성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석등으로, 높이가 6.36m이다 꽃잎의 형태는 3천 년 만에 한 번 핀다고 하는 우담바라화의 꽃잎인데, 이 꽃은 부처님 오심이 지극히 드문 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꽃의 8 잎은 8 정도[정견, 정념, 정정진, 정명, 정업, 정어, 정사유, 정정]이고 화창 넷은 사성제와 부처님의 광명이며, 복의 모습은 진리의 소리이다. 곧 8정도로 수행하여, 사성제의 진리의 이치를 밝히고, 광명을 놓고, 진리의 소리를 중생들에게 들려주어, 마음의 등불[자등명, 법등명]로 세계를 밝혀 주시는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석등이다.
화엄사 각황전(국보 67호)
본래 이 자리에는 2층 4면 7칸의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을 의상조사께서 조성하였으나 임진란 때 소실 되었다. 계파 성능선사(桂波 性能禪師)께서 장육전 중건 불사의 대발원의 백일기도로 문수보살의 선몽으로 공양주 스님이 화주승으로 선택되고, 시주자는 화엄사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는 거지노파로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고 불보살의 원력으로 왕궁에 태어나기를 서원하고 소(沼)에 몸을 던지고 공주로 환생했는데 한쪽 손을 쥔 채로 태어났으며 공주는 인경황후(仁敬王后) 막내딸로 태어났다. 황후는 1680년(숙종 6년) 음력 10월 26일 2경(二更: 오후 9시~ 11시)에 경덕궁에서 발병 8일 만에 천연두로 젊은 나이인 20세에 승하했다. 어머니를 여읜 아기 공주는 유모와 나인의 보살핌 속에 자라났다. 5년 후 공양주 스님을 만나 손이 펴지니 손바닥에 장육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장육전 법당을 짓기 시작할 무렵에 영조(英祖)의 모친(母親)이며 후궁(後宮)인 숙빈최씨(淑嬪崔氏)도 同參하여 숙종 25년(1699)에 시작하여 숙종 28년(1702)에 완공을 보았고, 무릇 2층 48칸으로서 그 장엄함은 비길 데 없었으며, 연잉군(영조)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1703년에는 삼존불(三尊佛)ㆍ 사보살상(四菩薩像)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경찬대법회(慶讚大法會)를 열었으며 장육전 중건 불사를 회향하자 조정에서는 사액하여 각황전(覺皇殿)이라 하고, 예조는 한 격 높여서 올려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이라 하였다. 부처님을 깨달은 왕이란 뜻과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300호)
이 탑은 절 안의 원통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무늬 없는 석재로 구성된 소박한 모습이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탑신(塔身)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이곳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이나, 조각수법은 이에 못 미쳐 이보다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4사자 감로탑은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조성한 것이며 4사자의 표정은 인간의 감정인 희로애락(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을 표현한 것으로 사람들의 수많은 번뇌를 뜻하며, 사자의 표현은 부처님의 말씀, 부처님의 법문을 사자후(獅子吼) 또는 감로법(甘露法),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석탑은 사람들의 수많은 번뇌를 부처님의 청정한 지혜를 얻게 하여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나 연화장세계로 이끌어 주는 감미로운 탑이라 할 수 있다. 2007년 2월에 주지 종삼스님이 이끼제거를 하여 탑이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보존공사를 하였고 다시금 2012년 2월에 4사자 감로탑 해체보수 및 보존처리공사를 했다.
▲ 홍매화(紅梅花, Red Plum, 흑매)
홍매화는 조선 숙종 때 계파 선사께서 장육전이 있던 자리에 각황전을 중건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홍매화를 심었다. 일명 장육매라고 하며, 또는 각황매, 각황전 삼존불을 표기하여 삼불목이라고 한다. 홍매화의 붉은 꽃빛은 시주할 돈이 없이 애태우며 간절한 마음으로 헌신 공양한 노파의 마음이런가. 환생한 공주의 마음이런가. 언제나 위태로운 왕자를 보며 애태운 숙빈최씨의 마음이런가. 홍매화는 그들의 피 끓고 애타는 마음의 빛깔처럼 붉고 또 붉었다. 홍매불자는 향긋한 향기를 불보살님 전에 올리고 아름다운 자태를 참배객에게 보여주어 환희심을 불러일으키니 고색창연한 가람 화엄연화장법계와 화엄동천에 홍매화 향이 가득하네
▲ 나한전(羅漢殿)
▲ 사사자 삼층석탑, 견성전(적멸보궁), 삼성각(독성, 칠성, 산신) 방향으로 올라갑니다.
▲ 견성전(적멸보궁)
▲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은 7세기 또는 8세기 중반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각황전 남서 측의 효대(孝臺)라 부르는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석탐은 상 · 하층의 높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몸체)과 상륜부(머리장식)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주 불국사 다보탑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특수형 석탑으로 유명하다. 사사자 삼층석탑이라는 명칭은 네 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떠받치고 있는 독특한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교에서 사자는 부처님의 위엄과 지혜를 상징한다. 네 마리의 사자는 각각 입모양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데 입을 벌린 정도에 따라 신성한 언어 또는 희로애락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석탑의 하층 기단에는 천인(天人)이 조각되어 있고 1층에는 인왕(人王), 사천왕(四天王) 등이 조각되어 있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한편 석탑과 이를 마주 보고 있는 석등의 중심에는 각각 인물상이 존재한다. 이 인물상들은 화엄사의 창건자로 알려진 연기조사와 그의 모친이라는 설, 스승과 제자라는 설 등 다양한 해석이 전해지고 있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은 안전진단 결과 구조적 불안정으로 인해 2016년 해체되어 2021년에 수리를 마쳤다. 수리 후 석탑의 높이는 약 7.1m, 폭은 4.2m, 무게는 약 50톤에 이른다.
▲ 동 오층석탑, 적묵당(左), 보제루(右)
화엄사 동 오층석탑(보물 132호)
화엄사 대웅전 앞에는 동서로 쌍탑이 서 있다. 그중에 동쪽에 서있는 것이 이 탑으로 크기는 서로 비슷하지만 서탑이 조각과 장식이 화려한 반면, 동탑은 아무런 장식 없이 단정하다. 탑은 1층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서탑의 기단이 2층인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1층 몸돌이 높이에 비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또한 각 층 몸돌의 너비가 줄어드는 정도는 큰 것에 비해 높이의 줄어드는 정도가 적어 늘씬해 보인다. 지붕돌은 매우 평평하고 얇은데 몸돌을 따라 너비의 줄어드는 정도가 큰 편이며, 그중 1층과 2층의 차이가 한층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있고, 다시 사잇기둥을 두어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이 2층 기단인데 비해 1층 기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돌구성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는 서탑과 비슷한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신라말기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道詵國師)께서 조성한 것으로 신라, 백제의 양식이 혼합된 탑이다. 부처님의 모든 법이 거짓과 꾸밈이 없고 순수하여 진실 그대로 참된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곧 부처님 도량은 참된 장소요. 세계요. 법계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탑이다. 증명탑, 다보탑, 다보분좌탑이라고도 한다. 오층은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 보살계, 불계를 표현하고, 장식과 꾸밈이 없음은 청정한 마음을 표현하며, 단층기단은 일승법을 뜻하니 이 탑의 사상은 부처님과 보살님과 사람들의 성품은 둥글고 원만하여 차별이 없고 꾸밈이 없으며 평등한 마음의 세계가 곧 화엄세계요, 연화장세계라는 것을 증명하는 탑이다.
1999년 10월에 보수 중 이 탑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8 과를 비롯, 330여 점의 성보 유물이 나왔다.
적묵당(寂默堂)
적멸(寂滅)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여신 곳. 화엄경을 설한 장소를 적멸도량이라 함으로 화엄사의 적묵당은 번뇌를 쉬고 고요적적한 세계로 이끌어 주는 승당(僧堂)이다. 본당(本堂)은 화엄사승가대학 학인(學人) 스님들이 부처님의 경전교리를 배우 고 실천하며 수행하는 장소요. 또 대중스님들이 모두 모여 공양(供養)을 하며 대중공사ㆍ회의도 하는 대중방(大衆房)이었으나 전애는 사교반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인조 10년(1632) 벽암선사께서 중수하고, 정조 19년(1795)에 행원(幸元) 스님 이 중수했으며, 1941년에 동월병선(東月秉善) 스님이 중수, 1978년 명선(明煽) 스님이 보수, 1979년 수각 방향으로 밑에는 바라지창 2개가 있는 2간 벽을 헐고 마루로 반 이상 나오게 나무로 벽장을 만들어 하단에는 이불장 상단에 는 서고(書庫)를 만들었으며, 1998년 종걸스님이 이불장과 서고를 헐고 벽을 로 만들고 혜원당 왼쪽 끝방에 도서실로 꾸며 서적(書籍)을 이곳으로 옮겼다.
2010년 1월 30일에 종삼(宗三) 스님이 기와번와 하였다.
▲ 괘불지주(掛佛支柱)
괘불지주(괘불석주)는 큰 법당 앞에 세워서 야외 법회 행사 때에 괘불을 거는 석주물이다. 괘불은 평소에는 말아서 불단 뒤의 궤에 보관하다가 특별한 행사가 있을 경우 불전 앞마당에 괘불지주를 설치하고 괘불을 걸어 야외 법회를 진행한다. 현재 괘불(화엄사영산회괘불탱)은 화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보통 석가탄신일 · 천도재 같은 큰 법회나 의식은 사찰 안의 넓은 야외에서 여는데 이를 '야단법석'이라고 한다. 흔히 '여러 사람이 몹시 소란스럽게 법석을 떠는 것'을 야단법석이라고 하는데 이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과 대웅전
화엄사 서 오층석탑(보물 133호)
화엄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있는 쌍탑 가운데 서편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동탑이 아무런 조각이 없는 반면 서탑에는 조각과 장식이 가득하다. 형태는 기단(基壇)은 2층이고, 그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워져 있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향에 따라 배치하였고, 위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나뉜 두 면에는 8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이며 몸돌에는 각 층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 1층 몸돌 4면에는 4 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 배치하였다. 지붕돌은 각 층마다 밑면에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처마밑은 수평이 되게 하였다. 머리장식에는 2층의 단을 둔 받침 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있다. 석탑의 형태는 높고 가파르면서도 상하의 체감비율이라든지,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수법 등이 잘 조화되어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특히 아래층 기단의 12지신상 조각은 석탑에서 흔하지 않은 예의 하나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1층 몸돌 세 곳에 나타난 조각상은 그 배치에 보다 신중을 기하였고 특히 12지신·8부중·4천왕 모두 불교의 수호신적 기능을 지닌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탑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각상을 각 부분에 새긴 점이나,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 남쪽으로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례석이 놓여 있다
신라말기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께서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조성한 것으로 화엄사의 대가람의 배가 백두산의 혈맥의 웅대한 힘과 섬진강의 태극의 힘에 출렁되니, 부처님 사리를 두탑에 봉안하여 요동함을 막음과 동시에 가람의 원만한 기운이 감돌도록 하였다. 기단 아래 조각형태는 12지신으로 개개인의 사람들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수호신이고 위 부분의 조각형태는 팔금강(八金剛)과 사천왕(四天王)으로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의 제자를 지키고 보호하는 신이며 이 탑을 일명 옹호탑(擁護塔)이라고도 부른다. 2층 기단은 상대의 차별을 없애고 절대 차별이 없는 이치인 불이법(不二法)을 표현한 것이다.
1995년 8월에 보수 중 이 탑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22과를 비롯, 16종 72점의 성보 유물이 나왔다.
화엄사 대웅전(보물 299호)
화엄사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이며 크기는 전면 19.5m, 측면 12m 로저 정면 5칸 , 측면 3칸이며 부처님 머리 위에 못과 풀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 우아하고 형태가 일품인 천개(天蓋)가 조각되어 있다.
법당에는 깨달음의 세계(진리)를 몸으로 삼기 때문에 모양과 빛깔이 따로 없고 오고 가는 곳도 없이 진리 그대로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과 열심히 수행하신 공덕으로 복과 덕이 가득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는 원만 보신 노사나불(圓滿報身 盧舍那佛)과 모든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신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 釋迦牟尼佛)로 목불(木佛)인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은 인조 8년(1630)에 벽암(碧巖) 스님과 문도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며 삼존불상은 인조 10년(1632) 안치하고, 영조 33년(1757) 주지 회심(會心) 대사 때 처관(處寬), 학찬(學贊), 섭심(攝心), 탁계(卓戒) 스님께서 중수 및 삼존불 개금과 함께 후불탱화 삼폭을 완성했으며, 정조 22년(1798) 화엄사 대웅전 중수를 했다. 1972년 도광스님이 삼존불 개금불사, 1989년 4월에 종원스님이 탱화보수, 1997년에 종열스님이 개금불사, 2000년에는 종걸스님이 법당마루 보수를 했으며, 종삼스님이 2013년 2월에 양쪽 옆문을 교체하였으며, 영관스님이 2014년 1월 28일에 대웅전 신중단 옆으로 불등단(佛燈壇)을 설치했다.
대웅전 편액은 인조 14년(1636년)에 의창군(義昌君)이 쓴 글씨이다.
▲ 범종각(梵鐘閣)
화엄사에 3층 누각의 에밀레종 버금가는 정도로 무게가 20톤이나 대는 신라화엄대종 (新羅華嚴大鐘)이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왜병이 종을 갖고 가다가 용두리 앞 섬진강에 빠트렸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범종각은 1976년 11월 28일 준공과 더불어 타종식을 거행했습니다. 종 이름은 화엄사 가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이 머물고 있는 곳이니 지혜를 범어로 반야라고 합니다. 그래서 반야범종(般若梵鐘)이라고 부릅니다. 명선스님이 건립했다.
새로운 범종과 범종각을 조성하기 위해 종삼 주지스님이 2012년 11월 4일에 범종각을 해체하여 보광사로 보내고 , 2013년 4월 18일 반야범종(般若梵鐘)인 화엄사 성보가 담양보광사로 옮겨갔다. 2013년 3월 8일에 범종각 상량식, 4월 12일(음력 3월 3일) 범종의 무게 3300관으로 범종주조와 함께 새로운 범종각을 건립하고 타종식을 거행했다. 종면에 새겨진 조각형태는 4분 비천상과 사리탑의 4 사자상의 모습으로 했다. 종 이름은 백제 땅에 연기존자 께서 전해주신 화엄경을 따서 화엄사라 하듯 화엄법계의 성종(聖鐘)이라고 해서 화엄성종(華嚴聖鐘)이라고 부릅니다.
▲ 영산전(靈山殿)
▲ 보제루
▲ 운고루(雲鼓樓)
화엄사 운고각(운고루) 사물(四物)은 중생들을 제도하는 네 가지 물건이라고 합니다. 법고(法鼓)는 축생(짐승)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는 것이며 악기로서의 북이 아니라 법요에 쓰는 북이라는 뜻에서 법고라 합니다. 운판(雲版)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 허공을 헤매는 영혼등 허공계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는 것으로 청동으로 된 판을 구름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운 판이라 합니다. 목어(木魚)는 물속에 사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는 것으로 나무를 잉어 모양으로 만들어 그 속을 비게 파내어 두두리면 소리가 납니다.
범종(梵鐘)은 육도중생(六道衆生)을 제도하기 위한 것으로 새벽에 28번을 치는 것은 천상 28천(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이며, 저녁에 33번 치는 것은 28천과 오도(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합해서 33이 됩니다. 육도 중생들이 진리의 범종 소리를 듣고 기쁜 마음을 내어 불도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운고각은 1918년 금정암에 계시는 세월(世月) 비구니께서 중건하시고 1976년 명선(明煽) 스님이 범종각(梵鐘閣) 세우면서 운고각을 해체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종삼(宗三) 스님이 2010년 10월 21일에 운고각 해체하여 신축불사 중건했으며, 2012년 6월에 운고각 단청불사 및 운고루(雲鼓樓) 현판을 달았다.
▲ 사천왕문(四天王門)
▲ 원융료, 범음료, 청풍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상왕문(象王門)
▲ 뒤돌아본 보제루(普濟樓)
보제루는 부처님의 법문을 들려주어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는 법요의식(法要儀式) 장소입니다. 누각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누각형식의 건물로 인조 때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중창했다. 순조 27년(1827)에 금봉우익선사(錦峰祐益禪師), 랑규(朗奎) 선사께서 크게 고쳤다
1974년 12월에 리산 도광선사께서 중수했다. 주지 종열스님 때는 보제루 안에는 화엄석경, 괘불탱화사진. 화엄사 성보유물사진, 동서양탑 성보 유물 사진과 부처님 사리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었으며, 종삼스님 때는 불교 관련 전시물을 장소로 많이 활용하고 있다. 2007년 8월에 종삼스님이 해체보수를 하셨습니다.
▲ 금강문(金剛門)
▲ 청풍당(淸風堂)
백옥같이 아름답고 고결하며 청정한 마음의 향풍(香風)을 갖고 불보살님과 사중(寺中)을 위하여 시봉 하며 수행정진하는 보사(補寺)님들이 거주하는 당우이었으나 보수를 하고 산사에서 기도하는 불자님들이 기거하는 방사로 사용하고 있다. 1987년 6월 10일에 원응종원(圓應宗源) 스님이 중창하였으며 2007년에 종삼 주지스님이 보수하고 2008년 4월에 기와번와 5월에 단청을 다시 하였다. 청풍당 앞에 수각을 없애고 왼쪽으로 2 칸 5칸 요사체 및 정자(亭子)와 저장고 지하시설 증축을 2012년 10월 25일에 완공하였다.
▲ 금강문(金剛門)
▲ 반야문(般若門)이라는 현판을 단 화엄사 템플스테이 수련원
▲ 화엄사 성보관(華嚴寺 聖寶館)
▲ 화엄사 일주문(불이문)
▲ 오늘은 화엄사 입구에서 출발하여 화엄사 자연관찰로와 화엄사 경내를 자세히 둘러보았는데요. 화엄사 관람을 마치고 화엄사 입구 갓길에 주차에 있는 산악회 버스를 타고 화엄사를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