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행 일시 : 2017년 3월 5일 토요일, 08:13 - 17:19
2. 산이름 : 북한산 백운대(836m), 북한산성
3.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ㆍ성북구ㆍ종로구ㆍ은평구, 경기도 고양시ㆍ양주시
4. 산행 코스 : 북한산성입구 버스정류장 → 대서문 → 중성문·중성 암문·중성 수문 → 가사당암문 → 의상봉 → 가사당암문 → 용출봉 → 용혈봉 → 증취봉 → 부암동암문 → 청수동암문 → 문수봉 → 대남문 → 대성문 → 보국문 → 대동문 → 용암문 → 백운봉암문 → 백운대 → 백운봉암문 → 북문 → 원효봉 → 서암문 → 수문 → 북한산성방문자센터 → 북한산성입구 버스정류장
5.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17.83km(9시간 6분) = 북한산 정상 백운대까지 12.37km(6시간 26분) + 하산 5.46km(2시간 40분)
북한산성입구 버스정류장(08:13) → 1.50km → 대서문(08:35) → 1.63km → 중성문(09:03) → 1.53km → 의상봉(09:55) → 2.90km → 대남문(12:09) → 0.46km → 대성문(12:21) → 1.36km → 대동문(12:54) → 2.99km → 백운대(14:39) → 1.72km → 북문(15:45) → 2.68km → 수문(16:53) → 1.06km → 북한산성입구 버스정류장(17:19)
6. 명산 인증 및 순위 : 블랙야크 명산 100(61좌 인증), 한국의 산하 인기명산 100(3위)
7. 북한산 및 북한산성 소개
1) 북한산
서울의 진산 북한산은 조선조 초기에는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렀다. 삼각산이란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각산은 양주의 경계에 있다. 일명 화산(華山)이라 하고, 신라시대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불렀다.
이 산은 경성(京城)의 진산으로 동명왕의 아들 온조가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백운봉 (白雲峰, 지금의 백운대), 인수봉 (仁壽峰), 만경봉 (萬景峰,지금의 만경대)등 세 봉우리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북한산성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성은 백제 온조왕이 터를 잡았고 그후 개루왕 때 성터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치른 뒤 숙종 37년(1711년)에 시작하여, 6개월 만인 그해 10월에 완공하였다 한다.
북한산성은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정상을 기점으로 서쪽 산자락부터 원효봉, 염초봉, 백운대, 만경대, 용암봉, 문수봉, 나한봉, 나월봉, 용출봉, 의상봉까지 연결하여 쌓은 산성으로 총 길이가 10km에 달한다. 당시 산성에는 14개의 성문을 냈는데, 산성의 정문 격인 대서문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수문, 서암문(시구문), 북문, 백운대를 지나 위문, 용암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청수동암문, 대서문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산성에는, 부황동암문, 가사동암문이 설치되었다.
현재는 대부분 성문을 복원하였다. 북한산에 수많은 등산로 거미줄 같이 얽혀 있어 산행시 주의를 요하는 곳이다. 북한산의 산행 들머리는 대표적으로 여섯 군데를 꼽고 있다. 우이동 기점, 4.19탑 기점, 정릉 기점, 세검정 기점, 불광동 기점, 구파발 북한산성 기점으로 구분할 수 있다.
2) 북한산성
북한산성은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과 서울시 강북구, 종로구, 은평구 경계의 북한산 정상 능선을 따라 위치하는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북한산성의 명칭으로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수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요새로서 북한산성의 명칭이 등장하나 삼국시대의 북한산성이 현재의 북한산성과 같은 곳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시대 고종19년(1232) 몽고군의 2차 침입 시 이곳에서의 격전과 거란의 침입 시 태조의 재궁을 이곳으로 옮긴 일도 있었고 조선 숙종 대에는 대대적인 수축 및 증축이 있었다. 성벽은 내탁과 內外俠築으로 견고하게 쌓았으며,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함으로써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기록에는 14개소의 성문이 있었고 이 중 5개소에 문루가 세워졌으며 3개소의 장대지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26개소의 저수지와 99개소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나 확인이 불가능하다.
8. 북한산성 산행 지도 및 gpx 파일 다운로드
2017-03-05-서울-은평구-북한산성입구정류장-대서문-경기-고양시-의상봉-문수봉-대남문-대동문-백운대-북문-원효봉-북한산성입구정류장.gpx
9. 산행 사진
▲ 대남문
▲ 뒤돌아본 대남문
▲▼ 대성문(大城門)
대성문은 북한산성의 동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년)에 지어졌다. 문의 형식과 규모는 대남문과 같다. 대성문은 형제봉 능선을 타고 서울의 북쪽 평창동과 정릉동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문이다. 성문 하부는 횽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닫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 단층 문루는 우진각 지붕 형태인데, 이는 지붕 네면 모두에서 불화살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2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 대성문에서 보국문으로 갑니다.
▲ 뒤돌아본 보현봉과 대성문
▲ 산성주능선에서 바라본 원효봉, 염초봉, 노적봉, 정상인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용암봉
▲ 산성주능선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장대와 바로 우측 뒤로 영봉, 도봉산 오봉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 보국문(輔國門)
보국문은 북한산성의 동남쪽에 있는 암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년)에 지어졌다. 보국문은 소동문 또는 동암문이라고도 한다. 암문은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출입문으로 이용되었으며 전쟁 때에는 비밀통로로 사용되었다. 암문은 돌로 만들었지만 홍예 형태가 아닌 방형의 평문 형식이며 상부에 문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1993년에 보국문 상부의 여장을 복원하였고 부분적으로 수리하였다.
▲ 북한산 칼바위능선
▲▼ 대동문(大東門)
대동문은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년)에 지어졌다. 서울의 동북쪽 수유동과 우이동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문의 형식과 모습은 대남문이나 대성문과 같다. 그러나 홍예문은 이 문이 가장 크다. 하부의 홍예문은 통로로 사용되었으며 상부의 단층 문루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3년에 새로 복원하였는데 이때 홍예문 상부의 여장도 함께 복원하였다. 문루 바깥쪽에 낮은 담장 형식으로 쌓은 여장은 아군이 몸을 숨기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도록 설치한 군사 시설이다.
▲▼ 동장대
동장대는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장대로 1712년(숙종 38년)에 지어졌다. 장대는 장군의 지휘소로 북한산성에는 동장대 외에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현재는 동장대만 남아 있다. 동장대는 최고 지휘관이 사용하던 곳으로 장대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되었다. 장대의 평면은 정방형이며, 중층 구조로 아래층은 벽 없이 트여 있어서 지휘하기에 편리하도록 했으며, 위층은 창으로 막아 방을 만들어 사용했다. 장대의 구성이나 모습은 수원 화성의 서장대와 거의 같다. 이 장대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6년에 복원한 것이다.
▲ 동장대에서 바라본 대성문, 보현봉, 대남문, 문수봉, 청수동암문
▲ 용암사지
▲ 북한산대피소
▲ 용암사지 석탑
▲▼ 용암문(龍岩門)
용암문은 북한산성의 대동문 북쪽에 있는 암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년)에 지어졌다. 용암봉 아래에 있어서 용암봉암문이라고도 부르며 우이동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암문은 일반 성문과 달리 은밀한 곳에 만들어 전쟁 때에는 비밀통로로 사용하였다. 암문은 그 모양이 홍예가 아니 방형이라는 것이 특징이며 상부에 문루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용암문은 동암문인 보국문과 달리 성 내부 쪽을 홍예형으로 만들었다. 용암문 상부의 여장은 무너졌던 것을 1996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 노적봉 앞
▲ 뒤돌아본 노적봉
▲ 염초봉과 백운대
▲▼ 뒤돌아본 노적봉
▲ 원효봉과 염초봉
▲ 북한산 백운대
▲ 갈림길(← 북한산대피소 1.3km, 백운대 0.4km↓,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3.7km →) : 백운대 방향으로 올라갑니다.
▲ 백운동암문
북한산의 주봉(主峰)인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의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1711년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 암문 중 하나인데, 일제강점기로부터 위문(衛門)으로 불려왔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백운봉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는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무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 백운대 올라가는 등산로에서 뒤돌아본 만경대, 노적봉과 그 뒤로 보이는 보현봉, 문수봉, 나한봉
▲ 등산객들이 서있는 곳이 백운대 정상입니다.
▲ 백운대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본 인수봉
▲ 삼각산(북한산)의 유래에 대한 안내판
삼각산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서 볼 때 이 봉우리들이 마치 세 개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삼각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정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때의 부아악이 삼각산을 말하는 것이다.
▲ 북한산 정상 백운대의 모습
▲ 인수봉
▲ 통일서원
조선 대대로 물려받은 조국강산 겨레도 나라도 하나이기에 피와 사랑으로 한 덩이 되어 우리 손으로 통일을 이루오리다.
▲ 3·1운동 암각문
이 암각문은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새긴 기록문이다. '경천애인' 이란 네 글자와 함께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2월 10일 최남선이 작성하였으며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자신이 독립선언 만세를 도창했다'라는 내용을 새겼다. 이 글을 새긴 시기는 3·1운동 이후로 추정되며, 그 목적은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암각문을새긴 정재용은 1886년 해주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로, 1919년 2월 19일 해주에서 상경해 3·1운동의 불을 당겼던 장본인이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의 북한산 정상 백운대(白雲臺, 836m)
2017/03/14 - [다시 가는 100대 명산] - 북한산성 16문 스탬프 투어 ①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의상봉 ~ 용출봉 ~ 문수봉 ~ 대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