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행] 대릉원

    1. 여행 일자 : 2019년 2월 2일 토요일


    2. 여행지    : 명선도 일출 +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 첨성대 + 대릉원 + 동궁과 월지 야경 


    3. 소재지  


    명선도(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진하리) + 주상절리 파도소리길(경북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 하서리) + 첨성대(경북 경주시 첨성로 169-5, 인왕동) + 대릉원(경북 경주시 계림로, 황남동) + 동궁과 월지 야경(경북 경주시 원화로 102, 인왕동)


    4. 대릉원(大陵苑) 소개


      

    신라 고분들이 모여 있는 대릉원은 경주 시내 한가운데 약 12만 6,500㎡의 너른 땅 위에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30기의 고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옛날무덤들 속에는 무덤 주인과 함께 수많은 껴묻거리(부장품)가 같이 묻혀 있고 때로는 무덤 주인의 시종이나 노비들이 함께 묻히는 순장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대릉원은 신라의 왕권강화가 이루어졌던 시기인 4세기에서 6세기 초까지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천마도의 '천마총'과 대릉원이라 이름 붙이게 된 댓잎군사의 전설 이야기가 재미있는 '미추왕릉',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이면서 금관이 발굴된 '황남대총' 등이 모여 있다.


    1970년대 정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한 뒤 내부를 복원하여 교육 및 연구 자료로 삼고자 했으나 그와 같은 큰 고분을 발굴해본 경험이 없는 터라, 그보다 작고 가까이에 있는 155호분을 발굴하여 경험을 쌓으려 했던 것이 지금의 천마총이 되었고 이때 모두 1만5천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경주의 신라무덤들을 능, 총, 묘로 구분하는데, ‘미추왕릉’처럼 어느 왕의 무덤 인지 확실 할 때는 왕의 이름을 붙여 '능'이라 하고 '총'은 천마총과 같이 발굴 후, 출토된 유물의 보존 가치가 높지만 누구의 무덤인지 모를 때, '묘'는 '김유신묘'처럼 귀족이하 일반인들의 무덤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 된 역사일수록 역사서 속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있기 마련인데, 무덤들은 책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입고, 먹고, 잤는지 같은 생활상의 지식창고 역할을 하고 있다.


    5. 대릉원 다음지도및 교통편(찾아가는 길)


      1) 다음지도

     


     2) 교통편 : 대릉원의 교통편에 대한 정보는 다음지도 대릉원 길찾기를 이용하세요.


    6. 여행 사진


    ▲ 대릉원 매표소입니다. 입장료는 성인 2,000원, 단체는 1,600원이고 이용시간은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입니다.


    ▲ 대릉원 안내도입니다. 정문에서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을 차례대로 둘러보고 산책로를 통해 정문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 미추왕릉, 천마총 방향을 먼저 둘러봅니다.


    ▲ 경주 대릉원 미추왕릉 입구입니다.


    ▲ 경주 미추왕릉(慶州 味鄒王陵, 사적 제175호)


    이 능은 신라 제13대 미추왕(재위 262~284)을 모신 곳이다. 미추왕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며,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 내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미추왕 사후 제14대 유례왕대에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대나무 잎을 귀에 꽃은 병사들이 홀연히 나타나 적군을 물리치고 사라진 일이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미추왕릉 앞에 대마무 잎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적을 물리친 것이 선왕의 읍덕입을 깨달아 능의 이름을 '죽현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무덤 전체를 담장으로 둘러 보호하고 있으며, 능이 남쪽에는 위패를 모신 숭혜전이 있어 매년 후손들이 미추왕의 제향을 받들고 있다. 


    ▲ 다시 돌아나와서 천마총 방향으로 갑니다.


    ▲ 대릉원 영상관을 지나


    ▲ 천마총(川馬塚)에 도착합니다.


    천마총은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5세기 말 ~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밑둘레 157m, 높이 12.7m로 비교적 큰 무덩이며 왕또는 왕에 준하는 신분을 가진 사람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은 평지 위에 나무널과 껴묻거리 상자를 놓고, 그 바깥에 나무로 짠 덧널을 설치하여 돌덩이를 쌓고 점토로 꼼꼼하게 채운 후 봉분을 높게 쌓아 축조하였다. 


    천마총 발굴조사는 황남대총 발굴에 앞서 발굴 경험과 지식을 쌓기 위해 계획된 것으로 1973년 4월부터 12월까지 약 8개월 동안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유물 11,500여 점이 출토되었으며, 광복 이후 처음으로 신라의 금관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특히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 그림(天馬圖)이 그려진 말다래가 나와서 '천마총'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 무덤의 내부구조를 볼 수 있도록 복원하였으며, 출토된 주요 유물은 복제품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 천마총의 시대 마립간의 시대


    금관을 쓰고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에 묻힌 고대 신라의 왕과 왕족들


    ▲ 백화수피제 천마도 말다래


    ▲ 금동투조 말안장 앞뒤가리개(신라의 지배자가 앉은 금동말안장, 고대신라의 화려한 기마문화 증명)


    ▲ 천마총 피장자 착용 금제, 금동제, 일괄유물(고대 신라 마립간의 황금 위세품들, 최고 지배층의 권력과 힘을 상징)


    ▲ 금제조익형관식(고대 지배층이 쓴 모자의 위세품 금제관식, 섬세한 달개장식이 달린 새날개 모양)



    ▲ 천마총(지상식 돌무지덧널무덤, 지름 47m, 높이 12.7m) 구조


    천마총은 신라 고유의 무덤 형태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기본구조는 거대 봉분의 '지상식' 돌무지덧널 무덤으로 지상에 나무덧널(목곽)을 축조해 피장자와 부장품을 안치하고 장례를 치른 후 나무덧널 위와 사방 주위를 큰 강돌로 두껍게 쌓은 후 흙을 덮은 구조이다. 


    5~6세기 초반에 축조되어 다소 늦은 시기에 속하는 돌무지 덧널무덤이다. 평면 원형의 봉분은 지름 47m, 높이 12.7m이다. 봉분의 아랫자락에는 봉분을 보호하는 돌을 돌렸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북쪽에서만 일부 확인될 뿐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봉분은 흙과 잔자갈돌이 뒤섞인 상태로, 크기 20~30cm 정도의 큰 돌을 쌓은 직사각형 평면 형태의 돌무지(적석)는 지름이 23.6m, 높이 6m였다. 돌무지 속에는 나무로 설치한 덧널은 약 6.6m × 4.2m의 네모난 형태로서 높이는 약 2.1m로 추정된다. 덧널 안에는 무덤 주인이 안치된 널이 있었으며, 널을 둘러싼 석단과 부장품을 넣은 나무 궤가 있었다. 


    ▲ 껴묻거리 상자(부장궤)


    ▲ 나무널




    ▲ 천마총 사적기


    ▲ 경주 황남대총


    황남대총은 황남동에 있는 신라 최대의 고분이란 뜻으로 붙여진 명칭으로, 고분 공원 조성 계획예 따라 경주고적발굴조산단이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 조사하였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서로 맞붙어 있으며, 남쪽 무덤을 먼저 만들고 뒤이어 북쪽 무덤을 잇대어 만들었다. 무덤 구조는 모두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남분에는 남자가 묻혔고 북분에는 여자가 묻혔으며, 이들은 부부로 추정된다. 신라의 쌍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주인공들은 화려한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마립간기의 왈릉으로 보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현재 학계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을 제17대 내물왕, 제18대 실성왕, 제19대 눌지왕 중 한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 대릉원 후문



    ▲ 대릉원 관람을 마치고 야경 촬영을 위해 동굴과 월지(안압지)로 떠납니다.


    ▲ 동궁과 월지(안압지)로 돌아가는 중에 바라본 첨성대와 남산입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안압지의 야경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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