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남한산성 ① 남한산성 버스정류장 ~ 북문 ~ 벌봉 ~ 남한산 ~ 동문

    1. 산행 일시 : 2017년 1월 26일 목요일, 12:24 - 16:25  


    2. 산이름    : 남한산(522m)


    3.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4. 산행 코스 : 남한산성 버스정류장 → 북문 →  제4암문(북암문) → 동장대터 · 제3암문(봉암성 암문) → 벌봉 → 남한산 정상 → 제3암문 · 동장대터 →  제2암문(장경사신지 옹성 암문)  → 장경사  →  남장대터  → 동문 → 남문 → 영춘정 → 청량당 · 수어장대 → 서문 → 제5암문(연주봉옹성 암문)  → 북장대터 → 북문 → 남한산성 버스정류장

     

    5.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10.85km(4시간 1분) = 남한산 정상까지 3.06km(1시간 14분) + 수어장대(청량산)까지 5.54km(2시간 10분) + 남한산성 정류장까지 2.25km(37분)


    남한산성 버스정류장(12:24) → 0.44km →  북문(12:32) → 1.58km → 제3암문(13:06) → 0.73km → 벌봉(13:28) → 0.31km → 남한산(13:38) → 0.69km → 제3암문(13:52)  →1.74km → 동문(14:35) → 1.89km → 남문(15:21) → 1.22km → 수어장대(청량산, 15:48)  → 0.72km → 서문(16:01) → 1.53km → 남한산성 버스정류장(16:25)


    6. 명산 순위 : 한국의 산하 인기명산 100(남한산 95위 )


    7. 남한산성 소개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위치한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겨졌다. 남한산성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특히 조선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한산성의 축성과 몽진,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오늘날의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부터 축성되어 인조 4년(1626)에 완공 되었으며,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숭열전, 청량당, 지수당, 연무관 등이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8. 남한산 산행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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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산행 사진


    ▲ 남한산성 버스정류장


    ▲ 남한산성 버스정류장 옆의 유료주차장


    ▲ 남한산성 정류장 부근의 음식점


    ▲산성로터리 앞으로 보이는 곳은 남한산성 행궁입니다.


    ▲ 북문 앞의 남한산성도립공원 안내지도


    ▲ 남한산성 북문


    남한산성에는 동 · 서 · 남 ·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천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신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한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서어 내에 동문, 남문, 수구문 총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 제 1군포터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중정남한지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마련되어 있었다. 현재는 한군데도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이 군포지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평탄한 대기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춧돌이 발굴되고, 다수의 와편과 조총탄환이 나왔다.  군포는 목조가구로 된 건물에 기와를 얹고 토석벽을 두른 건물로 보이며, 초소건물 기능에 맞게 정면은 트여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에서 온돌이나 난방용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 영춘정과 청량산(수어장대)





    ▲▼ 제4암문(북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북문의 보조기능을 하도록 설치한 것으로 1km정도 내려가면 하남시 상사창동에 도달하게 된다. 이 문은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다.










    ▲ 남한산성 여장


    여장이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남한산성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힘든 전돌로 축조한 평여장이다. 그러나 여장은 축조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여장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형식이나, 급경사지에서는 계단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서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게 조성한 예도 보인다.

    여장에는 중앙에 근총한 1개와 좌우에 원총안 2개 등 3개의 총안과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 위한 타구가 마련되어 있고, 남한산성 여장규모는 길이 4.2m, 높이 1.3m, 폭 0.8m내외가 일반적이다.


    ▲ 동장대터에서 바라본 남한산 정상




    ▲▼ 동장대터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동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 동쪽에 있다하여 동장대라 불린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도니 5영 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인조 2년 산성 수축시에 설치되었고 누각도 함께 건립되었으나 18세기 초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제3암문(봉암성 암문) : 벌봉 방향으로 갑니다.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 이 암문은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며, 규모 또한 폭이 2.36m, 높이가 2.65m에 달해 문루만 없을 뿐 성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봉암성


    남한산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이 중에서 봉암성은 본성의 동쪽인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 빼앗겨 곤란을 겪었는데,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 12년에 부윤 윤지신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고, 숙종 31년 수어사 민진후가 포루를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본성에 대하여 새로 쌓은 성이므로 '신성'이라고도 하며, 동쪽의 성이므로 '동성'이라고도 하였다. 성의 길이는 2,120m이다.




    ▲ 성벽 뒤로 보이는 성남 검단산


    ▲ 오른쪽으로 남한산 정상이 보입니다.


    ▲ 은고개갈림길(← 벌봉 0.2km, 한봉 1.4km ↑, 위례둘레길(북문) 1.8km↓) : 한봉갈림목이 있는 갈림길입니다. 정면방향은 남한산 정상방향이고, 필자는 왼쪽의 벌봉 방향으로 먼저 올라갑니다.


    ▲ 벌봉앞



    ▲ 남한산성 제13암문


    ▲ 벌봉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하여 벌봉이라 한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정기가 서려 있는 벌봉을 깨트려야 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하여 이 바위를 깨트리고 산성을 굴복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벌봉은 해발 512.2m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497m)보다 높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을 청나라 군에 빼앗겨 적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 화포로 성안까지 포격할 수 있었다.




    ▲ 봉암산성 신축비


    봉암산성신축비는 숙종 12년 윤 4월 1일부터 봉암을 쌓기 시작하여 같은 해 5월 9일 마무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비문의 형태는 자연석 위에 정사각형의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으며, 판독 가능한 49자 외에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든 몇 글자가 더 있다. 비문을 통해 당시 광주유수 겸 수어사인 윤지선의 감독아래 봉암신성이 신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검단산과 고추봉(두리봉)



    ▲ 외동장대터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외동장대가 있던 곳으로 동장대와 벌봉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외동장대는 조선 숙종 12년 윤지선이 수어청 군사를 동원하여 봉암성을 축성할 때 함께 건립한 것으로 추측되며 국산들이 진을 치고 훈련하던 곳으로 보인다. 고지도를 보면 다른 장대와 달리 외동장대는 누각에 관한 기록이나 표시가 없어 처음부터 누각이 없이 축대만 설치한 것으로 추즉된다.






    ▲ 검단산, 고추봉(두리봉), 용마산



    ▲▼ 남한산 정상(522m) 삼각점







    ▲ 은고개갈림길



    ▲ 제3암문(봉암성 암문)



    ▲ 남한산성 군포지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중정남한지」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나, 현재는 한군데의 군포도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이 군포지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평판한 대지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보이는 초석과 벽체, 그리고 다수의 와편과 조총탄환이 나왔다. 이를 통해 군포는 목조가구로 된 건물에 기와를 얹고 벽체는 토석벽을 둘린 건물로 보인다. 또한 군포는 초소건물 기능에 맞게 정면은 트여있고, 내부에 온돌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정비 시에 발굴된 발굴시의 건물유구를 잘 보존하기 위하여 유구 위를 흙으로 덮고 그 위에 기존유구와 같은 형태의 모조초석을 설치하였다.






    ▲▼ 남한산성 제2암문(장경사신지옹성 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는데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으로 출입하던 곳이다. 본성과 연결부에 설치된 이 암문은 폭이 1.3m, 높이가 1.42m로서 다른 암문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다. 본성에 설치된 11개 암문 대부분이 문 밖에서 보면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지만 제6암문과 이 암문은 윗부분이 "ㅡ"자로 만든 평거식문이다. 또한 다른 암문은 원성 축조시 함께 만들어져 사전에 계획된 것인 반면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을 쌓으면서 신축한 암문으로 보인다.



    ▲ 장경사 전경


    ▲ 장경사 대웅전


    ▲ 장경사 일주문





    ▲ 송암정터


    송암정은우리말의 '솔바위 정자'라는 뜻이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가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 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 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결하였는데, 그 후 달 밝은 밤에는 이 곳에서 노래 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 바위에 서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내부'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 부르는 소나무이다.




    ▲ 영춘정과 청량산(수어장대)



    ▲▼ 동문


    남한산성에는 동 · 서 · 남 ·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 보수하였고, 인조 2년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정조 3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하였다. 이 때 성문마다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문)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동문에 있는 화장실


    ▲ 동문주차장


    ▲ 뒤돌아본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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