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여행] 실학을 꽃피운 다산초당과 다산박물관

    1. 여행 일자 : 2020년 5월 24일 일요일


    2. 여행지    : 석문산, 만덕산 산행 + 석문공원 + 다산초당 


    3. 소재지  


    만덕산(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강진읍 영파리 · 임천리 · 덕남리) + 석문공원(강진군 도암면 백도로 2084) + 다산초당(전남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길 68-35)


    4. 강진 다산초당과 다산박물관 소개



    1)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현판에 판각된 ‘다산초당'이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2) 다산박물관


    다산박물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인물로 선정된 다산 정약용 선생의 18년 유배지인 강진 유배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다산박물관은 다산선생이 생전에 남긴 친필 간찰과 저술, 주변 인물들의 자료를 수집·보관·전시하고 있으며, 다양한 디지털 자료들로 다산선생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또한, 어린이와 가족·청소년·공직자와 단체가 참여하여 강진에서 다산선생의 생활을 느껴볼 수 있도록 다산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5. 강진 다산초당 안내도, 다음지도 및 교통편(찾아가는 길)


     1) 강진 다산박물관, 다산초당, 백련사 안내도




     2) 교통편 : 강진 다산초당의 교통편에 대한 정보는 다음지도 다산초당 길찾기를 이용하세요.


    6. 여행 사진


    ▲ 석문산, 만덕산 산행 하산길에 다산초당과 다산박물관을 둘러보았습니다. 현재의 다산초당에는 다산초당, 동암, 서암, 천일각 등의 건물이 있는데요. 앞으로 보이는 정자가 천일각(天一閣)입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내려오는 길 왼쪽 방향에 있습니다.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동암에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800여 미터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을 만날 수 있다. 


    ▲ 다산초당으로 내려가는 길


    ▲ 동암(東庵, Dongam)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이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洞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 동암의 현판, 보정산방(寶丁山房)과 다산동암(茶山洞庵)


    ▲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 연못 속의 잉어


    ▲ 다산초당(茶山草堂)


    정약용(丁若鏞)은 1808년 봄, 해남 윤 씨 집안의 산정(尹愽의 山亭)에 놀러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茶山書屋)은 지난 7여 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白蓮寺)에 절치한 벗 혜장(惠藏)이 있었고, 다산(茶山)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서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학단(茶山學團)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 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 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선초부(茶山樵夫)라고 칭하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당시로 가보자. 제자들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자료 수집, 정리, 정서, 편집 등의 작업에 참여하고, 다산은 정열적으로 각종 저작을 집필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능력별, 수준별로 지도하고 독려한다. 한가할 때면 계곡과 연못을 거닐고 차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풍광르 시로 읊는다. 다산 초당은 유배객들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조선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었다.


    서각(書閣)에 귀를 기울여 보라. 다산과 제자들이 토론하는 소리가 들릴지 모른다.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 다산초당과 서암(西庵)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조만간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草堂)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 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소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 다산의 제자 윤종진(尹鍾軫)의 묘


    이곳은 다산 선생이 초당에서 양성한 18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윤종진(1803~1879) 선생을 모신 묘소이다. 선생의 자는 금계, 호는 순암이며, 부친은 강진읍 내에서 다산을 모셔온 윤규로이다. 다산 선생께서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삶의 터전을 새롭게 함은 물론, 제자들을 문답식으로 지도하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당시 저술은 18인의 제자들의 역할이 컸다. 다산은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은 순암을 위해 순암호기를 직접 써 주면서 호연지기를 키우게했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게 되자 순암은 18인의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를 조직해 평생동안 차를 만들어 보냈으며, 이 차는 금릉다산향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그는 1867년에 진사가 되었고, 1866년 병인양요 때와 1869년에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의병을 모아 참여하였으며, 추사 김정희, 백파 신헌구와 교유하였다. 문집으로는 순암총서를 남겼다. 배위 광주 이씨와 함께 묻혀 있으며, 현재의 비문은 1914년 성균관박사 이금이 썼다. 


    ▲ 윤종진의 묘 앞에 나 있는 뿌리의 길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시절, 인고의 세월을 느낄 수 있는 인상깊은 풍경입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 시인 정호승


    ▲ 정다산유적 안내판(丁茶山 遺跡)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류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선방을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 다산박물관 가는 길


    ▲ 다산박물관 안내도입니다. 다산박물관, 다조마당, 명상정원, 빗물정원, 다산마당, 다산광장, 말씀정원, 휴게쉼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네요.


    ▲ 다산박물관 전경입니다. 다산박물관은 매주 월요일은 휴관하고, 입장료는 어른 개인 2,0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어린이는 500원을 받고 있네요. 저는 박물관 관람은 하지 않았는데요. 다산박물관 안의 화장실은 안내데스크에 양해를 구하고 사용하실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다산박물관 관람 대신에 다산박물관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는데요.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입니다.  


    ▲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진 정석(丁石)은 다산초당의 제1경입니다.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다산초당의 바위에 새겨 넣은 것을 이곳 다산박물관의 말씀의 숲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정석의 정(丁)자에 대해 丁은 정약용이 아니라 윤단을 신선 정령위(丁令威)에 비겨 기리면서 윤단의 자취와 삶을 '丁石' 두글자에 압축하여 기념하였다는 김언종(고려대 명예교수)의 견해도 있네요. 


    ▲ 거중기는 수원 화성을 쌓을 때 사용했던 것으로 정약용에 의해 직접 고안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거중기는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에 복원모형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거중기의 복원모형이 궁금하신 분들은 수원화성박물관 포스팅을 참고해주세요.


    ▲ 오늘은 석문산, 만덕산 산행 하산길에 다산초당과 다산박물관을 둘러보았습니다. 지금 제가 서있는 곳이 다산박물관 주차장인데요. 여행을 오시는 분들은 다산박물관에 차를 주차하고 다산박물관, 다산초당 그리고 백련사를 차례대로 구경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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